2019. 9. 20.(금)


정성과 행복

[891호 13면, 발행일 : 2019년 6월 12일(수)] 죽음을 앞둔 노모가 중년의 아들에게 긴 글을 남겼다. 유언장이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읽으면서…

By editor , in 오피니언 , at 2019년 7월 30일

[891호 13면, 발행일 : 2019년 6월 12일(수)]

죽음을 앞둔 노모가 중년의 아들에게 긴 글을 남겼다. 유언장이다. 나는 장문의 편지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나의 삶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 실체를 몰라 답답한 마음으로 세상살이를 버티면서 살아왔다. 문제의 실체를 모르니 당연히 답변도 해결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 편지의 한 문장이 내 삶의 문제를 인식하게 하였고, 문제를 인식하니 해결전략도 찾을 수 있었다.

그 한 문장이 바로 [아들아, 정성스럽게 살아라!]이다.

경쟁과 시험이 중요한 사회에서 살아온 삶에는 최고와 최선만이 가치와 의미를 가지지만 정성의 가치와 의미는 상실된다. 늘 최고만 기억하고 강조하는 사회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하며 살아온 삶은 진정한 나의 삶이라 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삶이라 생각하고 경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서 사는 것 같다. 그런데 최고와 최선이라는 단어에는 비교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누군가의 삶과 인생을 늘 비교하면서 그를 이기기 위한 노력만을 최선을 다한 것으로 인정하는 사회에서 나의 삶은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한 삶의 주체는 나 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을 느끼려면 최고와 최선을 다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if적 사고는 진정한 이성적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최선을 다했는데 최고가 되지 못한 삶 즉, 경쟁에서 쳐진 삶은 낙오된 혹은 무능력한 삶으로 만들고, 무기력한 삶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 같다. 또한 최고가 되기 위한 최선의 삶은 함께 하는 것을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만든다.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다보면 매년 어렵고 힘들다는 학생들의 불평과 불만을 호소한다. 나만 잘 하면 되는 것이지 나랑 함께 하는 사람에게 내가 지닌 능력이나 역량, 기술 등을 왜 공유해야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불평과 불만을 들을 때마다 고민이 되면서 속상하다. 그리고 그것을 그 친구 개인에게만 탓할 수만도 없는 현실이 싫다. 인생의 출발부터 가정과 학교가 최고와 최선보다는 [정성]이라는 키워드를 염두 해 두고 성장시키고 교육시켰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본다.

정성은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역량과 능력만큼 하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속도가 50km로 달리는 역량이고 나의 속도가 20km로 달리는 역량이라면 나의 속도로 타인의 삶을 기웃거리면서 비교하지 말고 달리면 되는 것이다. 살면서 속도보다는 방향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나의 방향이 결정되면 타인과 사회의 비교 속도에 연연하지 말고 나만의 속도로 달리다보면 결국 삶은 살아지게끔 되어 있는 것 같다. 누구와 있든,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그 상대방에게, 그 장소에서, 그 무엇에 정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 나의 삶이고 인생이니까… 내 앞에 사람을 두고 스마트폰에 집중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보다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면 결국 지금도 놓치고 다른 것도 놓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내 앞에 있는 너에게 정성을 쏟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에 정성을 쏟다보면 삶은 풍요로워지고 행복해 질 수 있지 않을까…

중년의 아들에게 [정성스럽게 살아라] 하는 멘트는 내 삶의 방향과 나의 속도로누군가 비교하지 말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어미의 마음에 감동을 받았고, 내 삶에 있어서 정성스럽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나는 정성스럽게 살아가고자 한다.

이난 교수  |  기초융합교육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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