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8.(토)


권리와 결별하자

[전주대 신문 제912호 11면, 발행일: 2021년 9월 1일(수)]     교회의 목소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커지는 것은 민망한 현상이다.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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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대 신문 제912호 11면, 발행일: 2021년 9월 1일(수)]

 

한병수 목사(선교신학대학원 신학과 조교수/대학교회 담임목사)

 

교회의 목소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커지는 것은 민망한 현상이다. 교회는 본질상 타인의 유익을 구하는 공동체다. 기독교 대학의 모든 구성원이 늘 의식해야 하는 진실이다. 바울은 세상을 떠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지만 타인의 유익 때문에 이 세상에 머문다고 했다. 교회의 어깨에 놓인 제사장 나라의 소임은 교회를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위함이다. 교회의 밥그릇 챙기는 일에 젖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일말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제사장 직무의 부끄러운 역행이다.

 

바울은 이 세상 임금들과 이방인을 위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의 그릇이다. 자기 혈족의 구원은 소원의 형태로만 있었지 실제로는 그림의 떡이었다. 그릇은 채워지지 않고 비워질 때에만 제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은 사도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 방식은 권리의 포기였다. 자기 친족부터 복음을 챙겨주는 본성적인 권리를 포기하고 이방인 선교에 투신했다. 개인적인 면에서는 연애와 결혼의 행복 추구권, 자비량이 아니라 국비 군복무의 권리, 복음으로 말미암아 먹고 사는 전도자의 권리, 먹고 마시는 생리적인 권리까지 포기했다. 왜? 한 명이라도 복음의 수혜자로,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이를 위하여 바울은 생존의 권리마저 포기했다. 날마다 죽어 자신의 자아조차 비우려고 했다. 주님의 종 용도로서 제대로 비워진 최고의 그릇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떠한가! 내 목회만 성공하면 된다. 내 교회만 부흥하면 된다. 피해의 불똥이 내 교회에만 튀지 않으면 세상에 산불이 나도 상관없다. 이웃이야 어떻게 되든지 기독교만 종교의 자유를 사수하면 된다. 이러한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판단과 처신의 은밀한 돌쩌귀로 작용하고 있다. 그 배후에는 내가 무엇이든 취하여야 복이라는 더 은밀한 왜곡된 복개념이 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주님의 말씀은 교회의 실질적인 이해관계 앞에서는 변기통에 던져진다. 바울이 배설물로 분류한 것들의 취득이 복이라는 기복적인 미신이 판단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취득이 아니라 나눔과 베풂이다. 교회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타인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교회가 무언가를 취하고 받는다면 이미 상급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늘의 상급은 소멸된다. 그러나 교회가 준다면 하늘의 영광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이웃을 사랑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최고의 복이 주어진다. 이것은 누구도 바꾸지 못하는 복의 역학이다.

 

지금 교회는 기복주의 신학에 휘둘리고 있다. 그러나 참된 신학은 취하지 말고 베풀라고 한다. 이기려고 하지 말고 지라고 가르친다. 뾰족한 변론의 칼을 뽑지 말고 둥근 사랑으로 품으라고 한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다. 혹시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거짓말과 욕설은 모양도 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혹시 모든 것을 다 잃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신다는 사실은 폐하여질 수 없기 때문에 다 잃으라고 한다. 욥처럼 재산과 일꾼들과 자식들과 아내마저 다 잃었어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감사의 찬송이 나오는지 성찰할 것을 요구한다. 주님은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히 보존될 것이라는 처신의 기준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이 기준을 따르면, 교회가 자신의 생존을 사랑하고 집착하면 필히 멸망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고 세상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면 세상을 차지한다. 땅끝까지 유업으로 주신다는 시인의 예언은 오직 희생적인 사랑으로 실현된다.

 

교계에서 회장이나 대표라는 것은 입장이든 예산이든 최종 결정권을 가진 권력자가 아니라 당회든 노회든 총회든 회의의 사회자다. 다수결의 횡포를 저지하고 지극히 작은 목소리도 소외되지 않고 동등한 발언권을 얻을 수 있도록 회의의 질서를 유지하는 직분이다. 교회와 관련된 모든 기관의 대표들은 세속의 권력자와 같이 지배하고 다스리고 지시하고 명령하고 군림하는 자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교회의 덩치가 크거나 노회 분담금의 액수가 크면 각종 단체에서 쉽게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글의 모습이다. 교회가 천국을 보여주지 못하고 짐승의 세계를 오랫동안 보여왔다.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대표가 되면 가진 것을 하나라도 잃지 않으려는 판단과 결정을 고집한다. 각종 기관에서 소위 기득권 기질이 발동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은 성경의 상식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상식적인 것도 자신의 이해와 충돌하면 그 상식을 기꺼이 외면한다. 그게 안타깝다. 교회의 크고 작은 기관들이 어떠한 사안에 대해서도 십자가를 선택하길 기도한다. 대학사회 속에서 이러한 십자가의 기독교 정신이 누구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구현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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