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7.(월)


독자투고_크리스마스의 유서

[전주대 신문 제908호 7면, 발행일: 2021년 3월 24일(수)]   <크리스마스의 유서> 세상이 단 한 사람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에 하늘은 쏟아질…

By editor , in 문화 , at 2021년 3월 31일

[전주대 신문 제908호 7면, 발행일: 2021년 3월 24일(수)]

 

<크리스마스의 유서>

세상이 단 한 사람의 탄생일을 축하하는 날에
하늘은 쏟아질 듯한 선물을 허공 중에 뿌리고,
나무는 몸에 별을 둘러 낮에도 밤에도 꺼지지 않는 빛으로 거리를 밝혔다.

참 뜬금없게도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해서 유서를 써보자고 이야기했었다.

내일 당장 죽는 것도 아닌데 왜 유서를 써야 하냐고 내가 물으니
당신은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이라며
끝이 뭉텅한 연필 한 자라루와 종이 한 장을 건네주었다.

연필을 책상에 굴리고, 의미 없는 낙서를 끄적이고, 한참 넋을 놓다가
나는 첫 문장을 당신한테 많이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 뒤에는 길고 긴 나의 고해 성사문이 주를 이었다.

편지이자 고해 성사문 같은 내 유서와 달리 당신은
종이에 지주를 찍고, 주소를 적고, 생년월일을 기입했었다.

그리고 글의 첫 문장엔
내가 꽃길만을 걷진 않았으면 한다고 쓰셨다.

살아가면서 어떻게 늘 행복한 일만 있을 수 있으며
슬픔을 느낄 수 있기에 기쁨을 느낄 수 있고
기쁨을 느낄 수 있기에 슬픔도 느낄 수 있는 거니
기쁠 때는 크게 기뻐하고, 환하게 웃으라고 당부하셨다.

슬플 때는 그 상황이 절대 영원할 수 없으며
언젠가는 지나갈 상황이란 걸 기억하라는 당부와 함께,
의지할 수 있는 좋은 지인을 곁에 두고,
그 상황을 무던히 견딜 수 있는 지지대가 내 마음속에 있어서
힘든 시간, 잘 버텨내길 바란다고 하셨다.

살아보니 인생은 희로애락의 연속이었고
어차피 겪게 될 힘든 일은 더 적게
어차피 겪게 될 좋은 일은 더 많이 있기를 바란다는 말과
좋은 기회가 오면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문을 정진함에 있어서 소홀함이 없었으면 한다고 쓰셨다.

묵은 김치는 작은 장독에
각 김치는 큰 장독 2개에 담가놨으니 꺼내먹고,
육수에 우릴 멸치와 다시마는 냉동실 상단의 두 번째 서랍에 있으니
좋아하는 국수 해 먹을 때 꺼내 쓰고,
보리와 서리태는 창고에 넉넉히 쌓아두었으니 밥 해 먹을 때 쓰고
쌀은 옆 마을 양순 할아버지가 15일에 한 번씩 가져다주기로 했으니 무겁게 사 나르지 말고,

가스는 나가기 전에 한 번, 들어오고 나서 한 번 꼭 확인하고
귀찮다고 밥 거르지 말고,
사람 조심, 차 조심하고.

당신 유약한 살점이 불길에, 허공 중에 흩어지는 날에
홀로 남게 될 내가 걱정됐던 건지
길고 긴 당부의 말이 이어진 뒤에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배운 것 하나 없고, 괴팍한
늙은이랑 10년이 넘도록
같이 사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날 키우느라 밤잠 설치고,
새벽에 응급실로 뛰어가고
아픈 무릎 무시하고 몇 시간을 고생해서 만든 음식들
싱겁다고, 짜다고, 맛 없어 보인다고 먹지 않고 남기고, 손도 대지 않아서
고생하고, 속앓이하셨던 건 당신인데도 그런 머리말을 쓰셨더랬다.

조민지(문헌정보학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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