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30.(화)


먼저 내리시지요

-823호, 발행일 : 2014년 5월 28일(수)- “그날 오후 3시 도착하였는데,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람이 내리는 곳의…

By editor , in 신앙과 선교 , at 2019년 4월 29일

-823호, 발행일 : 2014년 5월 28일(수)-

▲ 김천식 문학박사(교회사전공 / 선교봉사처)

“그날 오후 3시 도착하였는데,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람이 내리는 곳의 바위가 미끄러웠다.”

 

1885년 4월 5일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매우 뜻 깊은 날이다. 이날 제물포(인천) 항구에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와 미국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부부가 상륙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누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까? 아마도 언더우드가 아펜젤러에게 먼저 내리도록 권유 했을 수도 있다. 언더우드는 1859년생이고 아펜젤러는 1858생으로 연장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Lady first’라는 서구문화 때문에 아펜젤러의 부인 ‘Ella Dodge’가 먼저 한국 땅을 밟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당시 제물포 항구는 대형 선박이 들어올 정도로 수심이 깊지 않았고 접안 시설도 잘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 일행을 태운 아라빅 호가 제물포에 도착하였을 때도 항구에서 멀찍이 떨어진 바다에 정박하였고 쌈판이라고 하는 작은 목선이 가서 사람들을 태우고 해안가 바위에 내려주는 그런 상황이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일행이 그날 오후 3시 도착하였는데, 그날따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고 이 때문에 사람이 내리는 곳의 바위가 미끄러웠다. 자칫 발을 잘못 내딛으면 미끄러져 위험 할 수 도 있는데, 여성으로 하여금 먼저 내려서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남편인 아펜젤러가 먼저 내려서 아내의 손을 잡아 안전하게 내리도록 도와주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누가 먼저 내렸냐가 얘기의 초점이 아니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사적인 순간인데도 불구하고 먼저 한국 땅을 밟았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다투지 않았고 -먼저 내리시지요- 하며 양보의 미덕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굳게 잠겼던 한국의 문빗장을 열고 한국 선교 역사상 이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첫 개신교 선교사들이 되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름이다. 아펜젤러는 H. G. Appenzeller이고, 언더우드는 H.G. Underwood 로서 first name 과 middle name 의 첫 글자가 같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의 인연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 ▶한국의 첫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좌)와 아펜젤러(우)

1880년대는 미국의 신학생들 사이에 선교 열기가 불붙은 시대였다. 이 선교의 열기가 프린스톤 신학교 학생들에게서 퍼지기 시작하였는데, 학생들의 주장은 ‘선교부흥 운동이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특별히 신학생들 중심으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선교 부흥 운동이 조직화되면서 전국의 신학교로 확산 되었다. 이러한 젊은 신학생들의 부흥 운동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선 청교도들이 유럽에서 이주하여 기독교국가의 기반을 닦아 놓았고 1730년대부터 1770년대까지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심령대부흥 운동이 미국과 세계기독교 역사상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때 활동한 부흥사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조지 화이트필드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독립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미국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라’임을 강조하며 심령 대부흥운동을 전개하였고 조지 화이트필드는 열성적인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 시켰다. 개신교계에서 시작된 해외선교도 대부흥 운동의 영향이었다. 전국을 뒤흔든 영적대부흥운동의 연장선상에 신학생들의 선교열정이 뜨거웠다. 19세기 후반에는 신학생들 중심으로 면려청년회(The Young People’s Society of Christian Endeavor)가 창설되었고 1880년 10월 전국신학교연맹(The American Inter-Seminary Alliance) 이 창립 되는 등 신학도들의 선교열기가 미국 동북부에 고조되고 있을 무렵 두 신학생이 선교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두 학생이란 바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이다. 이들은 1883년 10월에 코넥티커트 (Connecticut)주 하트포드(Hartford)에서 개최된 신학교연맹대회에 같이 참석하였다. 언더우드는 당시 미국 화란계 개혁교회가 운영하는 뉴 브룬스위크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학생이었고, 아펜젤러는 뉴 저지(New Jersey)주에 있는 드루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 학생이었다. 학교는 달랐어도 선교 열정은 동일하였고 2년 후에 제물포로 항해하는 기선에 같이 승선하게된다. 미국에서 한국선교가 준비되고 있을 무렵 한국에서도 선교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의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조짐이란 1882년에 체결된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이다. 이로 인해 1883년(고종 20년) 민영익을 대표로하는 수신사 절단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민영익은 워싱턴으로 가던 중 볼티모어 여자대학의 가우처박사(Dr. John F.Goucher)를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이 가우처박사로 하여금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확신하게 해주었다. 이후 가우처박사는 거금 2,000불을 미국북감리교선교부에 헌금하면서 한국선교의 추진을 요청하였다. 민영익은 후에 또 미국에서 동경대학 동양사교수로 한국 사정에 밝은 그리피스(W. E.Griffis)와 캐나다 선교사 게일(James S.Gale) 목사를 만나 한국을 위해 기도해 줄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1883년 6월에는 일본에 있던 미국북감리교회 선교부의 맥클레이(R. S. Maclay)가 한국에 와서 김옥균을 통해 선교사업에 대한 고종 임금의 윤허를 확인하는 등 한국선교를 가능케 하는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이 무렵 한국인 이수정이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편지가 The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지에 실렸을때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이 편지를 보고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한국 땅에 상륙하였다. 먼저 내리시지요

 

▲ ▶미국 대부흥회를 이끌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좌)와 조지 화이트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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