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2.(수)


사람의 향기: 긍휼

[전주대 신문 제907호 11면, 발행일 : 2021년 3월 3일(수)] “긍휼”이란 상대방에 대하여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공감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By editor , in 신앙과 선교 , at 2021년 3월 3일

[전주대 신문 제907호 11면, 발행일 : 2021년 3월 3일(수)]

“긍휼”이란 상대방에 대하여 창자가 뒤틀리고 끊어지는 듯한 공감의 마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의 가장 심각한 고통인 죄로 말미암는 죽음을 동일하게 느끼시고 대신 당하신 긍휼의 결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언어만 화려한 긍휼의 지식만을 우리에게 전달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긍휼의 실천까지 보여 주셨다는 점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되다”는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예수님의 실천적인 삶에 윤리적인 언어의 옷을 입혔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긍휼의 복을 말씀하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당시의 지성인들 대부분이 로마의 힘과 무력과 용맹을 숭앙했고 긍휼이나 자비는 피해야 할 영혼의 질병이요 경멸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더 강인하고 무자비한 자가 생존할 수 있고 출세의 부러움을 일으키는 시대적인 상황에서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있다는 역설을 쏟으신 것입니다.

산에 모인 무리들을 향해 그들의 의식이 젖어 있었던 시대 정신에의 역류를 주문하신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그런 삶의 원인을 제공한 원수에게 응당한 보복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휼의 마음을 지키라는 역설적인 권고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의 권고는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길러서 찬탈 당한 조국의 주권을 복원하고 자유를 수호하는 방향으로 민족적인 기운을 쏟아야 할 중차대한 시국에 어쩌면 유대인 무리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을, 사상적인 물정도 모르는 풋내기 영웅의 감상적인 선동으로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인간적인 문맥이 고려된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에 근거하여 복음을 증거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박했고 하나님은 누구시고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과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제시하신 것입니다.

긍휼의 복은 그냥 따뜻한 마음을 품으라는 인간적인 성정의 연마를 주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단순히 시간 속에서 때가 이르러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면모가 이러해야 한다고 교훈하신 것만도 아닙니다.

긍휼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하나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시편 103편13절에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리아도 “주의 긍휼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른다”(눅1:50)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가르쳐 주십시다. 여기서 우리는 여호와 경외와 긍휼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타인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다르지가 않기에 어쩌면 마땅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잠언의 지혜를 주목해 보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의 창조자를 멸시하는 자이니라”(잠17:3). 우리가 타인을 대하는 자세는 단순히 그 당사자와 결부된 문제만이 아니라 보다 궁극적인 면에서는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우리가 타인에게 어떤 유익을 제공하는 복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자신에게 그 자체로 복입니다. 즉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요,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는 그런 인생의 최종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일이기에 복인 것입니다.

긍휼은 그 자체가 복이라는 사실을 지혜자도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11:17). 타인에게 사랑과 긍휼을 행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영혼에게 유익이 된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인자하지 않는 것은 인자의 유익을 상실할 뿐 아니라 자신의 몸까지도 해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부재는 결코 중립이 아닙니다. 긍휼이란, 타인을 긍휼히 여기면 유익이고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해가 된다는 이중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자기를 성경대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자기애는 이렇게 역설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근사한 말을 했습니다. “당신이 타인에게 선할 때에 당신 자신에게는 최고로 선한 것입니다”(When you are good to others, you are best to yourself).

긍휼을 실천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바울의 독특한 방식이 있습니다.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운 마음으로 할 것이니라”(롬12:8). 이는 긍휼을 베풀되 긍휼의 대상에게 혀를 차면서 있는 눈치 다 주고 부담감을 팍팍 느끼게 만들면서 마지못해 억지로 떠밀리듯 동정하듯 긍휼히 여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긍휼의 실천은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상대방과 어떠한 계약적인, 의무적인, 인과적인 관계성에 기초하지 않은 자발성을 뜻합니다. 즉 긍휼은 마음의 중심에 어떠한 반대나 거리낌도 없이 넘치는 적극적인 자발성의 발로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즐거운 실천’은 긍휼 자체를 즐긴다는 말입니다. 대가를 바라는 투자가 아닙니다. 긍휼은 자신의 괜찮은 성품을 과시하는 생색용 수단도 아니며, 자신의 부실한 경건을 치장하는 장신구도 아닙니다. 긍휼은 한사람의 됨됨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한병수 목사 (선교신학대학원 신학과 조교수/대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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