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18.(토)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하)

[전주대 신문 제912호 11면, 발행일: 2021년 9월 1일(수)]   현장으로 보는 세계기독교 역사이야기40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By news , in 신앙과 선교 , at 2021년 8월 30일

[전주대 신문 제912호 11면, 발행일: 2021년 9월 1일(수)]

 

현장으로 보는 세계기독교 역사이야기40

 

아씨시의 평화로운 풍광, 초록 가득한 밀밭 뒤의 희미한 건물이 성 프란체스코가 잠들어 있는 성당이다.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고 한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아버지의 공장을 가보게 되었다. 그곳은 지하실에 있는 염색 작업장이었는데, 그 환경은 너무나 열악하였고 일하는 사람들의 몰골은 비참하였다. 이를 목격한 프란체스코는 자신의 아버지가 부자가 된 것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린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 축적 행태에 실망하고 불의하게 돈을 번 아버지와 결별을 선언하고 출가를 단행하였다.

프란체스코는 홀 홀 단신 성 밖의 허허벌판에서 돌로 움막을 짓고 고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움막에서 4km 떨어진 곳에 역시 돌로 작은 기도처를 만들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다.

성 프란체스코는 어떠한 선입 관념 없이 성서 즉,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순수하게 받아들였고 새들의 지저귐에 귀를 기울이는 등 자연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기록에 보면 날아가는 새들도 그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사나운 늑대들도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순한 양이 되었다. 그는 무력적인 힘도 없고 돈도 없이 오직 선함과 청빈으로 일관한 삶이였지만, 세계기독교사에 특기할 만한 족적을 남겼는데, ▪아씨시 근교 라베르나(L’averna)산에서 기도하던 중 예수님과 같은 성흔(못 자국 등 상처)을 받았고 ▪27세 때인 1210년에는 11명의 수도사를 데리고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를 찾아가 수도회 승인을 요청하였다. 이에 교황은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성 프란체스코의 순수한 신앙과 청빈 사상에 감동하고 수도회를 승인해 주었다. 이때부터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또 하나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이슬람 진영을 찾아갔다. 그는 모자 달린 수도복 차림으로 겁도 없이 서슬이 시퍼런 적진으로 들어가서는 술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호소하였다.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p. 40, 46)

그리고 그는 평생 누더기 옷 한 벌로 세상을 살았다. 그의 순수한 신앙과 청빈사상은 전 세계에 전파되었고 가는 곳마다 그의 이름으로 된 도시, 사람 이름이 수도 없이 많다.

아무튼 아씨시는 그로 인해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기차로 아씨시역에서 내려 한 발짝 내디디면 평화의 기운이 보드라운 바람결 되어 뺨에 와 닿는다. 나뿐만 아니라 같이 간 초등학생도 그렇게 느껴진다고 하였다. 초록 밀밭을 배경으로 보이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은 성스럽고 평화롭기가 그지없다.

 

 

 

교회사 김천식 박사 (joayo7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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