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 26.(수)


전북의 독립만세운동

-848호, 발행일 : 2016년 3월 16일(수)-  33 김천식박사의 호남선교역사 이야기33 전북의 독립만세운동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여 독립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By editor , in 신앙과 선교 , at 2019년 6월 21일

-848호, 발행일 : 2016년 3월 16일(수)-

 33 김천식박사의 호남선교역사 이야기33

전북의 독립만세운동

일제는 한일합방이후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하여 독립과 관련된 우리 민족의 어떠한 움직임도 용납하지 않았다. 독립운동의 가능성이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투옥하는 등 일제에 탄압에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일제의 탄압은 한 동안 한국사회를 얼어붙게 하였고 한국은 동토(凍土)의 나라가 되는 듯하였다. 물론 표면상으로 수 년 동안 아무 움직임 없이 잠잠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민족의 내면에 저항의 싹이 트고 있었고 얼어붙은 땅위로 뚫고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국내가 표면상 잠잠하고 있을 때 일제의 감시가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독립을 위한 조직과 활동이 암암리에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 등지에서 김규식, 여운형, 서병호 등이 활동하였고, 미국에서는 이승만, 안창호 그리고 일본 동경에서는 한국 유학생들이 뜻을 함께하고 있었다. 국외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이 국내의 종교지도자들과 독립을 염원하는 분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의 굴복으로 일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내놓은 평화안에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를 포함시켰다. 윌슨 대통령의 이 평화안 제창으로 인해 피압박 약소국가들이 독립을 부르짖게 되었으며,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불을 댕겼다.
고종 임금의 승하로 촉발된 3·1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 당시 고종의 인산(因山) 관계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 왔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각자 지방으로 내려가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것도 요인 중에 하나다. 전라북도를 비롯한 호남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라북도에서는 군산에서 맨 먼저 시작되었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에 의해서였다. 당시 이 학교 교사이면서 구암교회 장로인 박연세(후에 목사가 되어 목포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 거부로 붙잡혀 대구 형무소에서 옥사)와 이두열, 김수영 등은 서울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연락이 닿고 있었다. 이 때 영명학교 출신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김병수가 2월 28일 군산에 내려와 박연세를 만나 서울의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주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준 것이 독립만세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은 박연세, 이두열, 김수영 등은 3월 6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숨어서 독립선언서를 더 인쇄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3월 4일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박연세, 이두열이 붙잡히자 교사들과 학생들이 3월 5일 석방을 요구하며 군산 경찰서 앞에서 만세를 부른 것이 전북에서 처음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이다.
처음에는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가 주축이 되어 시작하였지만 곧바로 보통학교 학생들과 시민들도 합세하여 시위는 열기를 더했다. 이 열기는 인근으로 번져가 오산면 남전교회, 충남 서천군 종지동 교회 등에서 대거 독립만세운동에 합세하였다. 민중들의 시위는 수많은 우리 백성이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 투옥 당하는 고초를 겪었는데, 이 중에서도 영명학교 교사 문용기는 만세를 부르던 중 태극기를 든 오른팔을 일경이 칼로 내리치자 왼손으로 태극기를 흔들었고 일경은 다시 왼쪽 팔도 내리쳤다. 문용기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꼿꼿이 서서 사람들을 향해 만세를 부르라고 소리쳤다. 무자비한 일경은 심장을 찔렀고 문용기의 옷은 피로 물들었다. 군산은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거주하였고 수탈의 현장을 목격하며 살았기 때문에 반일 감정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볼 수 있다.

군산 구암동의 3·1박물관에 전시된 문용기의 피묻은 옷
일제강점기의 다가교, 원안은 신사(神社)
지금의 다가교(일명 신흥다리)

전주시내에서 예수병원 쪽으로 가다보면 신흥다리라고 부르는 다가교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것은 전주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 아니고 당시 다가산 정상에 있는 그들의 신사참배(神社參拜)강요가 목적이었다. 지금은 당시의 다리를 증축한 것이다.
다가교를 건너서 좌측의 다가공원으로 들어서면 오른쪽 귀퉁이로 다가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이 역시 신사(神社)참배를 위해 닦아 놓은 길이다. 신사는 비단 여기뿐만 아니라 기전학교 마당에도 있었는데, 신사 접근이 용이하도록 신흥학교 한쪽 마당에서 기전학교로 올라가는 계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호남 최초로 설립된 전주서문교회 마당에는 오래된 종각이 하나 있다. 나무로 된 종각은 100여년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처음 달려 있던 종은 일제강점기에 강탈 당했다. 그 옆에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은 서문교회를 담임 했던 목사로서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과 신사참배 거부 등 민족운동에 헌신한 김인전, 배은희 두 분 목사의 기념비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비석에서 기독 정신에 입각한 반일 정신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월 12일(토) 신흥학교 운동장으로 손에손에 태극기를 든 학생들과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3·1 만세운동 재현행사에 참가하기 위해서 였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행사는 독립만세 김인전 목사의 외침, 독립선언서 낭독이 포함된 기념식에 이어 시가행진과 풍남문 광장에서의 재현극, 사진전 등으로 진행 되었다. 본 행사는 순국선열들의 얼을 이어 받아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의 정체성 및 자긍심을 심어주며 나라사랑정신을 계승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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