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6.(일)


<진리의 샘>타자 중심적 자아관

[전주대 신문 제910호 11면, 발행일: 2021년 5월 12일(수)]   나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이해가 타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고의…

By editor , in 신앙과 선교 , at 2021년 5월 14일

[전주대 신문 제910호 11면, 발행일: 2021년 5월 12일(수)]

 

나의 존재와 인생에 대한 이해가 타인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사고의 추종자는 많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타자 중심적인 자아를 추구한 대표적인 사상가다.

<나와 너>(Ich und Du)라는 자신의 명작에서 그는 인간의 존재를 관계 속에서 파악한다.

이는 관계가 “존재의 범주요 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상태요, 사물을 파악하는 그릇이요, 영혼의 형틀”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은 알고자 하는 자와 알려지는 자가 서로를 바라볼 때 비로소 개시된다.” 각각 있는 그대로의 “타고난 나”(das eingeborne Ich)와 “타고난 너”(das eingeborne Du)는 그런 관계에서 발견된다. 관계를 떠난 “나 그 자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여기에서 관계는 비인격적 관계(나와 그것, Ich und Es)와 인격적 관계(나와 너, Ich und Du)로 구분된다.

타인을 만날 때 인격적인 “너”로 대하면 인격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타인을 “그것”으로 대하면 대화는 비인격적 독백으로 전락한다. 타인을 인격적인 “너”로 대하면 둘 다 인격자가 되지만, 경험과 이용의 대상으로 대하면 비인격적 “그것”으로 추락한다.

그래서 타인을 “그것”으로 대하면 타인이 무시되는 것인 동시에 나 자신의 인격도 위태롭게 된다.

이런 동시성은 관계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예를 들면, 관계적인 존재로서 내가 ‘너’를 ‘아버지’로 대하면 ‘나’는 ‘너’의 ‘아들’이다. 관계 속에서 나는 너에게 작용하고, 너는 나에게 작용한다.

이런 상호작용 없이 지배하고 군림하고 지시하는 일방적인 관계의 대표적인 것은 바로 미움이다.

미움은 “나와 그것”의 맹목적인 관계이며, 사랑은 “나와 너”의 호혜적인 관계이다.

이런 사랑의 관계에서 개인의 행복하고 유익한 공적 생활과 사적 생활이 마련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된다.

타인을 “너”가 아니라 “그것”으로 대하면 자신도 “그것”으로 변질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무언가로 상대방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부버는 인간이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대체될 수 없고 한정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타인은 언제나 타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타인을 그의 생김새, 말투, 눈빛, 표정, 행동, 나이, 성별, 학력, 가문, 경력에 대한 과거의 지식이나 기억으로 대체하려 한다.

그렇게 타인을 과거의 경험으로 대체하면, 타인은 “그것”이다. 어떤 경우는 편리와 이윤의 창출을 위한 도구처럼 타인을 이용하려 든다.

이럴 때에도 타인은 “그것”이다.

이처럼 “경험과 이용”은 타인을 “그것”으로 대하는 방식이다.

경험을 통하여 타인을 재구성할 재료를 축적하고 타인의 이용을 통하여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면 “너”와의 인격적인 만남은 사라진다.

인간은 관계적인 존재이고 만남이다.

만남은 늘 현재인데, 만날 때마다 눈앞에 현재의 타인을 무시하고 경험과 이용의 대상이 된 과거와 미래의 타인을 소환한다.

과거와 미래의 타인은 실재가 아니라 대상이다.

나와 너 사이에 과거나 미래가 끼어들면, 만남의 직접성은 훼손된다.

그래서 부버는 나와 너 사이에 어떠한 매개물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매개물이 관계에 개입하는 순간 인격적인 “너”는 “그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나와 너 사이에는 어떠한 형태도, 어떠한 지식도, 어떠한 공상도, 어떠한 회상도, 어떠한 의도도, 어떠한 욕망도, 어떠한 예측도 끼어들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

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여 너와 나의 관계를 언제나 생생한 현재의 직접적인 관계로 만들어야 한다.

현재의 직접적인 관계가 나를 나 되게 하고 너를 너 되게 한다고 부버는 주장한다.

현재의 나와 너의 직접적인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가?

부버는 “은총에 의한 것”이라고 답한다.

이 은총의 다른 이름은 사랑이다.

사랑의 주소는 특정한 누구에게 있지 않고 너와 나의 사이라고 한다.

이 사랑으로 만나면 타인은 언제나 온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유일한 존재”이며 “그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너”로 발견된다.

사랑은 “너에 대한 나의 책임”이다. 이 책임은 타인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나아가 이 사랑의 출처는 “영원한 너”라고 부버는 주장한다.

사실 사랑에 기초한 “모든 관계의 연장선은 ‘영원한 너’”에게로 이어진다.

“나와 너”의 모든 관계는 “영원한 너의 옷깃”이며 그의 숨결을 느끼는 공원이며 그를 바라보는 창문이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너”의 이름이다. 이 하나님은 “나의 나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가까운 존재”라고 부버는 설명한다.

타인 중심적인 자아관을 가진 부버는 “영원한 너”인 하나님 없이는 있는 그대로의 “타고난 나”를 알 수도,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거꾸로, 자연이나 사람이나 어떤 정신적인 실재나 “그것”이 아니라 “너”로 여기며 “나와 너”의 관계를 맺는다면 “영원한 너”와의 인격적인 관계도 형성된다.

즉 부버는 “너와 나”의 관계만이 나와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뻥 뚫어주는 “새로운 길”이라고 한다.

진정한 나를 되게 하고 알게 하는 하나님은 누구인가?

부버는 인간이 알 수 없는 분이라고 한다.

이는 그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서술될 수 없고, 측량될 수 없는 세계 혹은 제한이 없는 존재라는 말로도 표상할 수 없고, 이 세상 안에서나 이 세상 밖에서도 그를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부버는 하나님의 계시만이 하나님을 아는 열쇠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 계시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진실이 있다고 설명한다.

부버의 자아관에 의하면, 진정한 나를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책장을 펼쳐야만 한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는 바로 성경이다. 이 성경에서 우리는 “영원한 너”인 하나님을 알고 그를 통하여 인격적인 너를 만나고 비로소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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