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25.(토)


1884년 12월 4일의 사건 이야기

-819호, 발행일 : 2014년 3월 26일(수)- 김천식의 전주 선교역사 찾아 떠나는 여행 김천식 문학박사(교회사 전공) 금번 게재는 한국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By editor , in 문화 , at 2019년 4월 24일

-819호, 발행일 : 2014년 3월 26일(수)-

김천식의 전주 선교역사 찾아 떠나는 여행

김천식 문학박사(교회사 전공)

금번 게재는 한국역사와 기독교 역사를 아우르며,
현재와 과거 그리고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를 넘나
드는 내용으로 한다. 역사를 얼마만큼 소중히 여기는
가에 따라 나라와 도시의 자리매김이 된다고 한다.
연재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우리의 역사 특히 기독교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바라며 연재를 시작한다.

“불이야!”
밖에서 들려오는 외침으로 인해 실내는 소란해 졌고 같이 있던 한 사람이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어둠속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던 괴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나온 사람에게 신속하게 다가가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그가 순간 위험을 감지하였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괴한들은 능숙한 솜씨로 그에게 칼을 휘둘렀다. 칼을 맞은 사람은 피투성이가 된 채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 졌고 괴한들은 바람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칼을 맞고 쓰러진 사람은  민영익이었다.

(민비의 조카로 보수파의 거두인 민영익)

그는 민비의 조카로 조선 왕실의 황태자 대우를 받고 있는 보수파의 거두였다. 이 밤의 사건이 다름 아닌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갑신정변은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김옥균은 고종 21년(1884) 12월 4일 저녁, 새로운 우편업무를 위한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 수구파 대신들이 참석하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객들에게 그들을 살해하도록 하고 거사를 단행하였다.

(우정총국;갑신정변의 현장-서울 종로구에 보존)

이 사건을 보면 정치란 어떤 면에서는 음흉하고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면 그날 개국 연회 자리에 김옥균은 민영익과 한 탁자에 마주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잠시 후면 김옥균 자신이 사주한 자객이 들이닥쳐 살해하기로 한 민영익과 태연하게 담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 김옥균은 민영익의 집에 홍영식, 심상훈, 어윤중 등과 함께 자주 드나들 정도로 가까 왔고 나라의 장래를 함께 의논하던 사이였다. 그러던 이들이 그날은 한 사람은 살해를 사주하고 한사람은 죽어야 하는 상황인데, 속내를 감추고 마주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의를 감춘 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를 나누는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 정치적 야망이 얼마나 교묘하고 잔인한 지 알 수 있다.
김옥균과 개화파가 일으킨 그날의 거사는, 새 정부를 선포하고 각료 명단과 14개 개혁 정책을 발표하는 등 성공하는 것 같았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은 실패하였다.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서양의학이 한국에 뿌리 내리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개신교 선교의 문이 열리는 계기를 준 사건이기도 하다. 그 계기란 김옥균이 일으킨 이 사건 와중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중상을 입게 된 것을 말한다.

(3일 천하의 주역 김옥균)

민영익은 보수파의 거두로서 이미 기술한 대로 우정총국 개국을 축하하는 자리에 있다가 개화파가 사주한 자객들에 의해 동맥이 끊기고 일곱 군데나 찔리는 등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다. 이 때 독일인 외무협판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ollendorf)가 즉시 민영익을 독일 공관으로 이송하고 한방의 14명을 불러 치료 하도록 하였다. 당시는 양방(佯方)치료를 불신하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한방의들이 감당을 못하자 묄렌도르프는 당시 미국공사관과 영국공사관의 공의로 근무하던 알렌으로 하여금 치료케 하였다.
왕진을 요청받은 알렌은 우선 출혈을 막고 응급처치를 하였으며 화농된 것을 배출시키면서 정성을 다해 민영익을 치료하였다. 당시의 알렌의 일기를 보면 그가 민영익을 치료한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ㅤㅁㅞㄹ렌도로프 집에 당도해 보니 중상자의 상태가 이미 출혈이 심했고 계속 피를 흘리고 있어서 빈사상태였다. 이곳에 치료하기 위하여 모인 조선인 의사들(韓醫)은 나의 뛰어난 치료 솜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영익은 오른쪽 귀 측두부 동맥(側頭骨 動脈)에서 오른쪽 눈두덩까지 칼자국이 나있었고, 목 옆쪽 頸靜脈도 세로로 상처가 나 있었지만 경 정맥이 잘리거나 호흡기관이 절단된 것은 아니었다. 상처는 등 뒤로 나있었는데 척추와 어깨뼈 사이로 근육표피를 자르며 깊은 상처가 나있었다. 예리한 칼자국이 난 부위는 구부러져있었다. 나는 피가 흐르고 있는 측두골 동맥을 관자놀이로 이어 명주실로 봉합하였고, 귀 뒤 연골과 목 부분, 그리고 척추도 모두 봉합했다. 그는 너무나 탈진상태에 있었으므로 지혈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팔꿈치에서 팔뚝까지 약 8인치의 깊은 상처도 명주실로 네 바늘 꿰매었다. -중략- 넓적다리와 오른쪽 무릎에도 길이 약 6인치의 긴 상처가 나있었는데 이것도 모두 봉합했다. -중략- 그의 정수리에는 계란 크기 만 한 큰 혹이 나있었다. 이 부위의 머리를 모두 잘라내고 상투를 튼 머리카락에 매달아놓았다. 혹은 머리 중앙부위까지 뻗어있었는데 이는 둔중하고 예리한 무기에 얻어맞은 듯했다. 만약 그가 몸을 피하지 아니했더라면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나는 새벽 2시에서 3시까지 한 시간 동안 내 가족을 돌보기 위하여 집에 다녀온 것을 빼고는 밤새도록 그를 치료하며 간호했다.” (H. N. 알렌, 2008,『알렌의 일기』, 건국대학교 출판부, pp. 30-31.)
민영익은 알렌의 응급처치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고 3개월 만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알렌의 서양의술이 인정받게 되었다. 알렌은 민영익을 치료한 공로로 이듬해인 1885년 2월 궁중 어의로 위촉 되었으며, 고종과 민비의 신임을 얻어 홍영식의 집을 하사 받아 그해 4월 10일 ‛널리 혜택을 주는 집‚ 이라는 뜻의 광혜원(廣惠院 ; House of Extended Grace)을 개원하였다. 광혜원은 13일 후에 고종의 명으로 “많은 사람을 도와준다.”라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명칭이 바뀌지만 광혜원은 우리나라 현대 의료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왕실과의 관계개선을 계기로 미국 선교사의 의료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물론 왕실의 신임 덕분에 미국 북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Dr. Horace G. Underwood)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Rev. Henry G. Appenzeller) 등의 입국이 허용되어 이들이 1885년 4월 5일 제물포를 통하여 한국에 들어오게 되면서 의료, 교육, 복음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아무튼 갑신정변이 분명한 정치적 사건이었지만, 이를 통해 단단히 잠겨 있던 문빗장이 풀리고 이 땅에서 개신교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 인용가능 (단, 인용시 출처 표기 바람) *

이 기사를 공유하세요
Share on Facebook
Facebook
Tweet about this on Twitter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