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1. 26.(목)


2등도 있습니다.

-858호, 발행일 : 2017년 11월 2일(수) – 우리 사회는 1등만 처(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다. 1등과 근소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2등의 존재를…

By jjnewspaper , in 신앙과 선교 , at 2019년 7월 10일

-858호, 발행일 : 2017년 11월 2일(수) –

우리 사회는 1등만 처(인정해) 주는 경향이 있다. 1등과 근소한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2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우리 사회에서는 1등 하려고 기를 쓴다. 물론 달리기 등 육상경기를 비롯하여 기록 위주의 경기에서는 등수가 매겨져야 하고 1등한 사람에게만 환호한다. 그렇지만 마라톤의 경우는 끝까지 달려 완주한 사람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는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성실하게 인내심을 가진 자에 대한 찬사이다.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1등이 있고 2등이 있겠는가?
호남지역의 기독교 전래는 미국남장로교 선교사들에 의해서였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다. 호남지역뿐 만아니라 한국 전역은 서방 세계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선교사들은 몸을 돌보지 않는 사역으로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전킨(Junkin)은 복음 전하기 위해 시골길을 다니다가 논에 고인물이 탈을 일으켜 고생을 하던 중 좀 쉬라고 환경이 좋은 곳으로 발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열심을 멈추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오웬(Owen)은 순천을 비롯하여 장흥, 고흥, 보성, 광양, 여수 등 여러 지역을 책임 맡아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던 중 과로로 질병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그도 역시 세상을 떠났다.

 

포사이드(Forsyth)는 전주 인근 지역으로 오후 늦게 왕진 갔다가 타국 군인으로 오인 받아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치료가 되지 않아 본국으로 후송되었는데, 완치 되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와서 의료 활동을 재개하였다. 그는 목포에서 광주로 가는 도중 나주에서 나환자를 만났다. 누구도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는 나환자를 친히 자기 말에다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온 일도 있다. 포사이드가 나환자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부축하는 광경을 본 젊은이가 감동을 받았다.
그 젊은이가 최흥종이다. 사연인즉, 포사이드 선교사가 나환자에게 하는 행동이 신기해서 바라보고 있는데, 나환자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포사이드가 옆에 있던 최흥종에게 그 지팡이를 집어달라고 말했으나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나환자가 쥐고 있었던 고름 묻은 지팡이를 집어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포사이드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집어서 환자에게 쥐어 주었다.(머뭇거리던 최흥종이 용기를 내어 집어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아무튼 최흥종은 포사이드의 나환자 사랑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후 ‘나환자의 친구’ 그리고 ‘거지들의 아버지’라 불리웠는데, 그는 목사로서 복음의 사회적 실천가(한인수,『호남교회 형성인물』, p.217)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이렇듯 초기의 선교사들의 이와 같은 헌신적인 활동과 죽기까지 사명을 감당한 모습은 한국인 목회자 및 신도들에게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귀감이 되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았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킨 선교사들의 정신을 잊지 않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이들과 함께 또는 이들을 이어서 활동한 한국인들 또한 기억해야 한다. 우선 한국 교계의 선각자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목사 일곱 분이 있다. 1907년에 선교사들과 한국인 장로들이 회합을 가지고 조선장로회 독노회를 발족시켰고 서경조, 방기창, 한석진, 양전백, 송린서, 길선주, 이기풍, 등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다. 장로회 사기에 보면
1907年(丁未) 九月 十七日에 朝鮮예수敎長老會獨老會가 成立하다. 至是하야 美國南北長老會와 가나다와 오스트렐냐長老會 四敎派宣敎師의 公儀會決定에 依하야 朝鮮예수교長老會獨老會를 組織하니 會員은 宣敎師三十八人 朝鮮長老四十人合七十八人이요會長은 宣敎師馬布三悅副會長邦基昌 書記韓錫晋 副書記宋麟瑞 會計宣敎師李吉咸이러라.
1. 公儀會時에 試取敎授한 神學第一會卒業生 徐景祚, 邦基昌, 韓錫晉, 梁甸伯, 宋麟瑞, 吉善宙, 李基豐七人을 牧師로 將立한事
2. 牧師李基豊을 濟州宣敎師로 派送한事

이리하여 한국에도 정식 목회자가 생겨났고 선교사들과 협력하면서 때로는 독자적으로 복음전파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지면상 이들의 면모를 상세히 피력할 수 없지만, 서경조는 서상륜의 동생으로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고 매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송천교회 설립에 초석이 되었다. 방기창은 황해에서 태어나 천도교의 지도급 인물이었으나, 개종하여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고 목사안수 받고 반석교회, 송호교회, 진남포의 노정교회, 용강읍교회 등을 설립하였다. 한석진은 북장로회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그의 조사로 활동하였다. 한석진은 이른 바 ‘평양교회 박해 사건’으로 평양 감영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후에 일본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한국유학생선교와 한인교회를 개척하였다. 양전백은 독립운동가로서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목사가 된 후에도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이로 인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평양 출신인 송인서는 마펫과 한석진의 전도로 교인이 된 후 한천교회를 설립하는 등 전도사 시절부터 활약하였다. 당시 개신교 박해 시 체포되어 사형위기에 몰리기도 하였다. 길선주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다. 그는 1897년 미국북장로회 리(G. Lee)선교사에게 세례 받고 장대현교회 영수로 시무하였다. 1907년 민족대부흥운동의 주역이었다. 목사 안수 후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였다. 특히 길선주 목사는 종말론적 신앙운동을 지도하여 일제강점기에 민족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었다. 기풍은 한국 최초의 외지 선교사로 제주도에 파송되었다. 제주도에서는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위협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이 후 광주에서 광주북문안교회 초대 목사로 시무하였고 제주도 성내교회, 순천교회, 벌교교회 등에서 시무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반대운동으로 체포되어 여수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는데, 고문으로 위독해지자 일경은 출감시켜 주었으나 그 후유증으로 금오도 우학리교회에서 소천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전남 지역에 조상학 목사가 있다. 조상학은 1906년에 오웬 선교사와 그의 조사였던 지원근에게 전도 받았다. 그는 후배들을 먼저 신학교에 보내 목사가 되게 하였고 자신은 늦게(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광양읍교회, 여수장천교회, 여천우학리교회에서 시무하였으며, 매산학교 교목으로 부임하였다. 조상학 목사도 일제강점기에 많은 고초를 당했으며, 애석하게도 한국 전쟁 때 북한군에게 연행되어 1950년 9월 28일 여수 초입 미평에서 처형당했다. 손양원 목사도 이곳에서 총살당했는데,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총살당한 조상학 목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를 못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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